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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대와 시대를 넘어 타인을 이해하는 일, <딸에 대하여> 김혜진 장편소설
    2023. 6. 7. 20:57

     

     

     

    세대와 시대를 넘어 타인을 이해하는 일 

     

     

    <딸에 대하여>는 단순히 동성애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피력하는 퀴어(성 소수자), 페미니즘 소설이 아닌 그 담론을 뛰어넘어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죽어가는 인간을 돌보는 일을 하는 늙은 화자는 자기 삶과 타인의 삶을 통해 느끼는 수만 가지의 감정을 오롯이 내보인다.  60대의 화자인 '나',  30대 딸인 그린, 죽어가는 노인 젠은 모두 열심히 살았고, 여전히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 있거나 지나온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현재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미래 역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생의 중간에서 허덕이는 젊음과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늙음, 과거의 영광과 무관하게 애처로이 죽음을 맞이한 운명을 통해  "삶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좋은 삶이었고, 충실한 삶이고, 바라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세대와 시대를 넘어 타인을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는 건 오늘을 무사히 견디어 길고 긴 내일을 살아내는 일이라는 삶의 무게에 조용히 공감하게 되는 묵직한 여운과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딸에 대하여 표지

     

     

     


    <딸에 대하여> 줄거리 

     

     

    60대인 '나'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혼자 살고 있다. 그녀가 돌보는 환자 '젠'은 평생을 이주민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여 존경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의 젠은 찾아올 가족 하나 없는 치매 환자일 뿐이다.  '나'에게는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데 바로 하나뿐인 딸이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이타적인 삶을 살았지만 결국 죽음을 앞둔 정신 나간 치매 노인에 불가한 젠의 삶도,  많이 배웠고 똑똑하지만, 동성애라는 평탄지 않는 삶을 사는 딸도 '나'에게는 버릴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타인이다. 대학 강사인 30대의 딸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고당한 동료의 부당한 처우를 항의하는 일을 돕는 일에 자신의 전세보증금을 사용한다. 결국 살 곳이 없어진 딸은 엄마의 집으로 그녀의 동성 애인을 데리고 들어 오면서 그들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나'는 천성적으로 딸보다 세심하고 온순한 성격인 딸의 동성 애인인 '레인'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갈등이 깊어진다. 딸이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딸의 동성 애인인 레인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지만, 경제력이 없는 딸 대신 생활비를 책임지고 있는 레인을 쫓아낼 경제적인 능력도 딸과 7년이나 된 관계를 부정할 명백한 이유도 찾지 못한다. 어느 날 대학교 앞에서 항의 시위하던 딸이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적의와 혐오, 멸시와 폭력, 분노와 무자비, 욕설과 비난이 난무하는 시위 현장을 목도한다. 딸이 서 있는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딸의 무사함에 안도한다. 그 사이 젠의 병실 이동을 거부하고, 젠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항의하던 '나'를 마땅치 않아 하던 요양병원의 과장은 젠을 변두리 허름한 병원으로 옮겨버린다. 

     

    '나'는 아무 연고도 가족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젠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극진히 보살핀다. 실업 급여를 신청하고,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딸과 딸의 애인과 가족의 역할을 하며 임종을 지키고, 장례까지 무사히 치른다. 죽음을 앞둔 젠이 선물한 짧은 시간의 휴전으로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딸과 딸의 애인인 그 애를 보며 살아가고 견뎌야 하는 내일을 기다린다.  

     

     

     

     

    <딸에 대하여> 감상평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모든 세대에 고함 

     

     

    <딸에 대하여>는 '동성애'라는 소재와 이해의 한계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 소설이다. 지금껏 소설 속 화자에게 이토록 공감했던 글은 없었다. 죽어가는 젠의 삶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60대의 '나'가 바라보는 섬뜩한 자각의 현실도 딸의 동성애를 인정할 수도 그렇다고 이해할 수도 없는 상실과 두려움의 감정도 오롯이 느끼고 공감하며 읽는 동안 내 어깨가 무거울 지경이었다. '어쩌자고 당신들의 삶은 이렇게 흘러갔는가?'라고 물을 수도 없고, 어떻게 되리라는 예측도 불가능하기에 그저 끝까지 묵묵히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책을 읽는 시간만큼 사유하는 시간이 길었다. 불안과 공허의 시대, 불확실한 세대를 관통하는 화자 '나'의 걱정과 염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생의 고민"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언젠가는 죽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죽는 일도 사는 일만큼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크다. 길고 긴 삶에 훌륭하고 존경받는 죽음은 없다. 누구나 똑같이 죽는다. 이 시대의 생은 기대보다 생각보다 바람보다 훨씬 길어서 두렵다.  

     

    생의 한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과 죽음을 동등한 비율로 대비하고 있을까? 누구나 삶의 문제에 비중을 둔다. 죽음을 준비하는 세대도, 죽음과 멀리 있는 세대도 걱정과 염려가 남지 않는 편안한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삶이라서, 혹은 안이한 삶이라서 그럴 겨를이 없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만 살아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보다 아득히 멀다고 느낀 죽음을 생각하고 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또 죽음과 멀어지는 생각을 먼저 한다.

     

    까치발을 딛고 두려움을 향해 방향을 트는 사람, 그래서 나는 화자 '나'가 타인의 생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오늘을 무사히 견디고 내일을 살아낼 힘을 하루하루 비축하는 일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는 부질없음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타인을 이해하는 일만큼이나 살아가는 건 예측할 수 없는 난제다.            

     

     

     

     

    <딸에 대하여> 책 속 문장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생각은 자연스럽게 딸애에게로 옮겨 간다. 딸애는 서른 중반에. 나는 예순이 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애가 도달할, 결국 나는 가닿지 못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나을까. 아니, 지금보다 더 팍팍할까. (p.22~23)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p.30)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이제 나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말을 도대체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누가 들어 주기나 할까. 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말. 주인이 없는 말들. (p.54)

     

    나는 공감하는 사람. 
    나는 응원하는 사람.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렵히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p.69)         

     

    나는 빛깔과 무늬를 달리하며 스스로 떠오르고 저무는 감정을 바라보느라 말을 잃는다. 딸애에게 걸었던 기대와 욕심, 가능성과 희망. 그런 것들은 버리고 또 버려도 또 다시 남아서 나를 괴롭힌다. 내가 얼마나 앙상해지고 공허해져야 그것들은 마침내 나를 놓아줄까. (p.97)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 
    이를테면 그런 이야기를 나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될까. 딸애에 대한 두려움과 서운함, 배신감과 노여움 같은, 어떤 감정이라 할 말한 것들이 빠져나가고. 그 애들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가차 없는 세계의 한가운데라는 걸 말할 수 있게 될까. (p.169)

     

    10년 뒤, 20년 뒤, 나를 이렇게 보살펴 달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이 애들이 자신들의 노년을, 젊은 날에는 어떻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그때를, 그렇지만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그 순간을, 단 한 번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책임과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제대로 된 짝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남겨 두고 가는 것이 걱정과 염려, 후회와 원망 같은 감정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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