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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권여선 소설, 치밀한 복수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의미책 2023. 6. 2. 23:46
치밀한 복수를 통해 본 죽음과 삶의 의미
<레몬>은 여고생이던 언니(해언)를 잃은 여동생 다언이 언니를 죽인 범인들에게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살인사건과 복수라는 자극적 소재와 어울리지 않는 이 책의 제목인 <레몬>은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권여선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단순한 살인사건과 복수를 다룬 통속적 소설이 아니라는 것은 읽지 않고도 짐작할 것이다. 소재는 자극적이지만 그러한 장면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은 채 인물의 내면과 심리를 다룬 소설이다. 결코 평범하지도, 평화롭지도, 평온할 수도 없는 삶의 당연함에 놀라고, 궁금하고, 두려워하며 쓴 삶의 이야기다. 레몬, 레몬, 레몬, 복수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파편적인 사건의 흐름을 서술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으니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길 바란다.
소설 <레몬> 차례
반바지, 2002
시, 2006레몬, 2010
끈, 2010
무릎, 2010
신, 2015
육종, 2017
사양 斜陽, 2019
소설 <레몬> 의 줄거리
2002년 다언의 언니인 해언이 살해되었다. 해언은 7월 1일 오후 학교 인근 공원 화단에서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해언의 사망 추정 시간은 6월 30일 밤 10시에서 7월 1일 새벽 2시 사이이다. 6월 30일 오후 6시경 해언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한 부유한 집안의 아들 신정준은 그의 알리바이를 증언한 사람들 덕분에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무면허 운전으로 벌금형을 받고, 퇴폐업소 출입으로 정학 처분을 받은 후 자퇴를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편 목격자였던 한만우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증언과 확실치 않은 알리바이로 용의자로 몰렸으나 결정적 증거가 없고 살해 동기가 미약해 결국 풀려났다.
17년이 지나 언니의 복수를 결심한 다언은 언니를 죽인 용의자로 지목받았던 한만우를 찾아간다. 오랫동안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었던 한만우의 집을 여러 차례 찾아가고, 그의 여동생 선우와 친밀감을 쌓으며 한만우의 입을 통한 결정적인 증언을 듣고 그가 범인이 아님을 확신한다. 누구라도 눈여겨볼 만큼의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함을 지닌 언니 해언의 독특한 자세와 습관적인 옷차림. 범인인 신정준은 해언을 묶어 살해한 후 유기하였고, 목격자인 윤태림은 신정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거짓 증언을 했다. 공범이 된 신정준과 윤태림의 거래는 결혼에 이르렀다. 하지만 살인사건의 비밀을 공유한 이들 부부는 그 사건에서 단 하루도 자유롭지 못한 채 괴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신정준과 윤태림의 딸 예빈이 유괴를 당한다. 하지만 과거의 살인사건이 수면 위로 오르는 것을 두려워한 시부모님의 반대로 수사는 그대로 중단되어 종결된다. 이로써 신정준과 윤태림의 죗값은 자식을 잃는 슬픔으로 대체된다.
큰딸 해언을 잃고 망가진 삶을 살던 다언의 엄마는 어느 날 다언이 데려온 아이에게 죽은 언니 해언을 투사하여 사랑으로 키우며 "혜은"이라고 부른다. '이 아이는 누구일까?'. 혜은은 다언이 유괴한 신정준과 윤태림의 딸 신예빈이다. 죽은 언니를 닮기 위해 여러 차례 성형수술을 감행하고, 결국에는 범인들의 딸을 유괴하여 키우는 다언의 복수는 그렇게 끝이 난다. 다언은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고, 죄책감과 고독을 곁에 두었다.
소설 <레몬> 감상평
찰나에 불과한 순간들, 삶의 의미
<레몬>의 노란색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니 해언이 죽었을 때 입었던 원피스의 색, 상희를 만난 다언이 입고 있던 노란 원피스, 다언의 앞에 놓였던 음료 레모네이드, 다언이 기억하는 시 「레몬 과자를 파는 베티 번 씨」. 찰나에 불과한 순간들을 노란색으로 상징하는 것은 아마 작가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애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가족을 잃고도 애도할 시간도 없이 떠밀리듯 살아온 다언과 어머니에게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언니를 닮도록 성형을 하고, 복수를 하는 동안 다언의 삶은 죽은 해언의 삶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잘못된 방향의 증오와 복수가 제자리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다언의 삶에 통쾌함과 시원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란색은 늘 희망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되었다. <레몬>은 해언과 다언, 만우, 이들 모두 죽어서라도 평온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기도가 담겨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작가는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애도를 거치지 못한 죽음은 남겨진 가족에게 어떠한 파장을 남기는지 이 글은 가감 없이 보여준다. 또한 다언이 증오했던 용의자 한만우가 이름처럼 "한 많은 이 세상~" 을 고되게 살아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삶은 어쩌면 처음부터 공평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는 건 다 서럽다, 누구나 다 그렇다, 인내하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주 잠깐 레몬의 신맛을 느끼듯 잠깐 황홀한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의 황홀함의 기억으로 견디며 살아간다. 그것이 삶이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는 삶은 불가하다. 작가의 말처럼 누구든 삶이 조금 덜 아프기를, 그 삶을 견딜 수 있기를 바란다.
<레몬> 소설 속 문장들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도, 언니의 삶에도, 내 삶에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거라고. 무턱대고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끝나는 게 삶이라고. (p.12)
열일곱살 6월까지도 나는 내가 이런 삶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이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살고 있으니, 이 삶에 과련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삶을 원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선택한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p.35)
결국 죽은 언니는 혜은이 되어 엄마에게 돌아왔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팩트다. 언니가 죽고 나서 십년 뒤, 실제로 살아 있는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혜은이 되었다. 내가 엄마에게 준 선물이다. (p.74)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시신처럼 납작해진 휴지를 손에 들고 울었다. 우는 게 누구인지 모르면서 울었다. 앞으로 내가 누구로 살게 될지 모르면서 울었다. 휴지를 뜯어 눈물을 닦았다. 누군가 봄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듯이, 나는 내 삶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다. (p.92)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니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p.179)
그래서 당신의 삶이 평하기를,
덜 아프기를, 조금 더 견딜 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당신의 평하지 못한 삶의 복판에,
아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삶 한가운데,
곱고 단단하게 심어놓으면 어떨까,
그러면 그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한그루 이야기가 될까, 생각합니다. - 작가의 말 중'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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